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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by 오지은 comment 류승완, 정승민, 홍인석,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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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필자는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23학번, 3학년 재학 중이다.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건축학교의 스튜디오는 교수만의 공간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다른 학교들의 설계 스튜디오 -예컨대 AA, 멘드리시오, ETH, 혹은 조너선 세르지온, 서재원, 피터 페레토, 이희준 등의 스튜디오- 와 비교해보면 우리 학교의 결과물은 사뭇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나는 그 결과물의 차이 속에서, 과정의 차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건축 세계에 입문한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은 내가 그 근본적인 차이를 단정짓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쩌면 아직 문외한이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나 인스타그램, 각종 웹사이트를 통해 엿본 다른 학교들의 스튜디오를 참고하며 우리 학교의 스튜디오 진행 과정-그리고 어언 10년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이어져 온 그 체계 속의 문제점, 혹은 어딘가 ‘고장난 부분’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는 필자가 생각하는 현 충남대학교 설계 스튜디오의 부작용들이다.
그러니까, 스튜디오가 한 학기동안 운항하는 한 척의 배라고 한다면, 어떤 배를 탈 지 고민하는 승객 또는 선원에게, 그 배를 실제로 운항하는 선장(교수)이 아니라, 단지 한 번 타본 탑승 경험자(선배)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셈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구조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부작용이 발생한다. 우선 학생들은 스튜디오와 교수에 대해 편견을 가진 채로 시작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 교수 너무 빡세.’ ‘거긴 발표만 잘하면 돼’ 야부리만 잘 털면 돼 ‘매주 잘 안해가도 마감만 잘 치면 점수 잘 줘’ 같은 이야기를 듣고 선택한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건축에 대한 관심사나 방향성보다 평판과 분위기, 한 학기동안의 ‘내 안위’가 스튜디오 선택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홍익대학교와 국민대학교에서 건축설계를 가르치고 있는 이희준은, 이 책(건축평단26)에서 몇 가지 스튜디오 원칙을 제시했다. 그는 ‘수강 신청하는 학생이 설계 스튜디오를 수강하는 관행은 지양되어야 한다. 학생이 강의 계획서를 바탕으로 수강하고자 하는 설계 스튜디오의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순번에 따라 교수가 해당 학생을 면담하여 각 설계 스튜디오에 가장 적합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좋은 방식 중 하나이다. 학기 초에 모든 교육자가 각 설계 스튜디오의 강의 계획서 내용을 전 학생을 대상으로 발표하는 강연회를 마련하고, 학생이 강연회 이후 설계 스튜디오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라고 말했다. 학생으로서도 정말 이상적이고, 선진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필자 역시 여러 번 목격했고, 솔직히 말하면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도 있다. 물론 의도적인 모방이라기보다는, 후배의 작품을 보다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묘한 기시감-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정도다. 하지만 이는 우연을 넘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작업 중 선배의 자료를 다른 모니터에 띄워놓고 참고하며 진행하는 모습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앞선 선배의 작품을 마치 '답지'처럼 보는 것이다. 왜 이런 사태가 나타날까?
이는 스튜디오가 과정의 실험보다 결과의 정답을 중시하는 구조로 운영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학생 개인의 문제도 있다.) 학생들은 평가의 기준이 불명확하거나 주관적이라고 느끼고, 결국 ‘이전 학기에서 좋은 평가(좋은 성적)를 받은 선배의 결과물’이 가장 안전한 방향이라 판단한다. 즉, 새로운 시도보다는 이미 검증된 틀을 따르는 것이 실패를 피하는 길이 되어버린다.
또한, 매년 설계 프로젝트의 주제·대상지·프로그램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는 구조 역시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생각난다. 아이의 교육과 양육에 부모 뿐만 아니라 온 지역사회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우리 학교 스튜디오 문화에 이 속담을 인용하는 것이 꽤나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5학년 졸업설계의 경우 규모도 크고 전시 준비도 많기 때문에, 이른바 ‘오야시다’ 문화가 우리 학교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건축학도들이 거쳐가는 의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학교의 특이한 점은, 저학년 즉 1-3학년 심지어 중간 크리틱 시기에도 온 학년이 돕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화가 왜 생겼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마감의 제출물이 과도하게 많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학생 개인의 시간 관리나 작업 태도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목표로 하는 결과물의 수준은 높은데 실제로 그걸 완성할 ‘손’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구조는 사교성과 인맥의 차이를 성과의 차이로 만들어버린다. 누군가는 선배나 동기와의 관계가 좋아 많은 도움의 손을 얻고, 결과적으로 훨씬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제출한다. 반면 누군가는 손을 빌릴 사람조차 없어, 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도 상대적으로 미완성된 결과를 제출하게 된다.
타 학년의 마감을 절대 돕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도움의 범위가 ‘대리 작업’으로 넘어갈 때 발생한다. 그 순간 결과물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되고, 누가 얼마나 직접 손을 움직였는가가 아닌, 누가 더 많은 손을 빌렸는가가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희준은 ‘한 학년의 모든 설계 스튜디오가 공통의 매체와 표현 방식으로 결과물을 제작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작품의 표현 방식은 입장과 맞닿은 것, 아니 그 자체다. … 최종 결과물 중 하나로 다이어그램이 필요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있고, 모형이 필요하지 않은 프로젝트도 있다. 다시 말해 결과물의 매체와 표현 방식은 설계 스튜디오의 진행 방식과 입장에 따라 다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학교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에 가깝다. 어느샌가 ‘다이어그램을 위한 다이어그램’을 만드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설계를 잘한다는 기준이 ‘누가 다이어그램을 더 화려하고 예쁘고 많이 만드느냐’에 맞춰져 있다.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되고, 사고의 깊이보다 그래픽의 완성도가 주변으로부터 평가받는다.